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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익스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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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쿄 익스프레스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해군이 과달카날 섬에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사용한 작전의 연합군 측 명칭이다. 본래는 "선인장 익스프레스"로 불렸으며, 일본군 스스로는 야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쥐 수송"이라고 불렀다. 항공 우세를 장악한 연합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야간에 구축함을 이용해 수송을 진행했으며, 구축함의 낮은 수송 효율과 잦은 손실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제도 전역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도쿄 익스프레스는 일본에게 전략적인 손실을 초래했으며, 1943년 2월 연합군의 과달카날 섬 장악으로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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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익스프레스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개요
1942년 언젠가
1942년 언젠가 "도쿄 급행" 작전을 위해 군함에 탑승하는 일본군.
시기1942년 8월 – 1943년 11월
국가일본 제국
소속일본 제국군
종류임시 군수 보급 조직
역할솔로몬 제도와 뉴기니에 위치한 육군 및 해군 부대에 대한 보급 및 증원
규모다양
지휘 구조(정보 없음)
주둔지라바울, 뉴브리튼 섬
쇼틀랜드 제도 및 부인, 솔로몬 제도
장비(정보 없음)
별칭칵투스 익스프레스 (Cactus Express)
"쥐" 또는 "개미" 수송 (일본어 명칭)
후원(정보 없음)
좌우명(정보 없음)
상징색(정보 없음)
군가(정보 없음)
마스코트(정보 없음)
전투 및 작전
주요 전투에스페란스 곶 해전
타사파롱가 해전
케 작전
블래킷 해협 해전
쿨라만 해전
콜롬방가라 해전
벨라만 해전
호라니우 해전
벨라라벨라 해전
세인트조지 곶 해전
기념일(정보 없음)
훈장(정보 없음)
전투 훈장(정보 없음)
지휘관
현재 지휘관(정보 없음)
명예 연대장(정보 없음)
주요 지휘관미카와 군이치
다나카 라이조
하시모토 신타로
이주인 마쓰지
식별
식별 상징(정보 없음)

2. 명칭

보급 작전의 원래 이름은 "선인장 익스프레스"였으며, 이는 연합군이 섬에 대한 암호명 "선인장"을 사용하면서 과달카날에서 붙여졌다. 미국 언론이 작전상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도쿄 익스프레스"라고 부르기 시작하자 연합군도 이 문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10] 일본군은 야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야간 보급 작전을 鼠輸送|nezumi yusō일본어라고 불렀다.

코스트 워처스 오브 솔로몬즈가 촬영한 쥐 수송 임무 중 항해하는 구축함 부대.


현지의 제8함대에서는 수송 임무가 구축함의 본래 임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고, 밤이 되면 활발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쥐와 닮았다"는 이유로 쥐 수송이라고 속칭되었다. 또한, 구축함 승무원은 "마루통"이라고 불렀다.[10]

대발동정 등의 소형 선박을 이용한 수송 작전과 잠수함을 이용한 수송 작전은 쥐 수송으로부터 연상하여 각각 蟻輸送|개미 수송일본어, モグラ輸送|두더지 수송일본어이라고 불렸다.

3. 편성 및 역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은 과달카날을 "선인장"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렀고, 미국 언론이 작전 보안을 위해 "도쿄 익스프레스"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연합군도 이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야간에 이루어지는 이 보급 작전을 鼠輸送|nezumi yusō일본어라고 불렀다.[2]

1942년 9월 초, 과달카날에 도착하는 일본군 증원 부대; 배경에 사보 섬이 보인다.


1942년 8월 과달카날 상륙과 헨더슨 비행장이 "선인장 항공대"의 기지로 설립되면서 연합군의 항공 우세가 확립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낮 시간 동안 화물선으로 과달카날과 뉴기니에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야간에 더 빠른 군함을 사용하여 수송하도록 승인했다.[2]

도쿄 익스프레스는 1942년 8월 사보 섬 해전 직후 시작되어 솔로몬 제도 전역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1943년 11월 26일 세인트 조지 곶 해전에서 요격되어 거의 완전히 파괴되면서 마지막 대규모 익스프레스 작전 중 하나가 끝이 났다. 구축함은 화물 취급을 위해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물자가 묶인 강철 드럼 안에 밀봉되어 바다에 밀어 넣어졌다. 이상적으로는 드럼이 해안으로 떠내려가거나 바지선에 의해 수거되었지만, 많은 드럼이 손실되거나 손상되었다. 1942년 12월의 어느 날 밤에는 1,500개의 드럼이 바다에 던져졌지만 300개만 회수되었다.[3]

도쿄 익스프레스 임무에 사용된 대부분의 군함은 라바울과 부겐빌에 주둔한 제8함대에서 왔지만, 트럭에 주둔한 연합함대 부대의 선박이 임시로 배속되는 경우도 많았다. 익스프레스 임무에 할당된 군함 편성은 "증원 부대"로 지정되었지만, 이 부대의 규모와 구성은 임무마다 달랐다.[4]

1942년 8월 7일, 연합국 군의 과달카날 섬 기습 상륙에 일본 해군은 육군에 협력을 요청했고, 육군의 이치키 부대 및 해군 육전대가 급파되었다. 이치키 부대 중 제1차 수송대(900명)와 육전대의 일부는 구축함으로 고속 수송하기로 했다. 8월 16일 구축함 오이카제로 육전대 1개 중대가 과달카날 섬에 상륙했다. 8월 18일 밤에는 이치키 부대 제1차 수송대가 과달카날 섬 타이보 곶에 상륙을 완료했다.

연합함대 사령부는 구축함을 함대 결전에서의 중요한 전력으로 여겼기 때문에, 처음에는 구축함에 의한 수송은 임시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가와구치 부대와 아오바 부대는 호송 선단에 의한 수송 방침이었다.

그러나 이치키 부대 제2차 수송대의 수송 선단은 수송선 1척 등을 격침당해 퇴각했고, 제2차 솔로몬 해전의 패배로 가와구치 부대의 선단 수송도 중지되었다. 구축함에 의한 소규모 보급과 지상 포격은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야간에 고속을 이용한 구축함 수송 외에는 의지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8월 25일에는 해군이 가와구치 부대의 구축함 수송을 제안했다.

수송을 담당하는 구축함과 호위를 담당하는 구축함으로 구성되었다. 전자는 물자 탑재를 위해 어뢰 등의 무장을 내렸다. 규모는 수송 담당 2척에 호위 담당 1척과 같은 소규모에서 경순양함을 기함으로 하는 수뢰전대 전체 약 10척에 달하는 대규모까지 있었다.

4. 수송 효율

원래 구축함은 수송 임무를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송 효율이 현저히 낮았다. 화물선을 징용한 수송선은 선박 1톤당 대략 1톤 정도를 수송할 수 있어 한 척으로 수천 톤을 수송할 수 있었고, 연료 소비량 측면에서도 효율이 좋았다. 반면 구축함은 대형 가게로형의 경우에도 배수량 약 2500톤에 대해 수송량은 15톤~20톤, 완전 무장한 육군 병사만이라면 150명 정도(당시 1개 중대 편성은 120명)가 한계였다.[3] 수송선은 화물용 대형 크레인 등을 갖추고 있어 전차나 중화기 수송도 가능했지만, 구축함은 내화정을 올리고 내리는 정도의 설비밖에 없어 분해한 대포를 소수 싣는 것이 고작이었다.

대발과 같은 본격적인 상륙용 주정도 실을 수 없어, 접이식 보트라고 불리는 손으로 젓는 소형 상륙용 주정에 물자와 병력을 옮겨 구축함의 내화정으로 예인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여유가 없을 경우에는 드럼통 등으로 방수 포장된 식량과 탄약을 밧줄로 연결하여 해상에 투기하고, 현지 부대의 대발이 회수하는 방법을 사용했지만, 종종 회수에 실패하는 경우가 있었다.[3]

더욱이 월명기(월령 15를 중심으로 한 전후 2주 정도)에는 수송에 나서는 구축함이 발견되기 쉬워 사용이 불가능했고, 수송 계획을 세울 수 없다는 병참 계획상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5. 전략적 영향

도쿄 익스프레스는 일본에게 득이 없는 도박으로 끝났다. 15개월 동안 많은 구축함이 손실되었지만,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5] 일본 제국 해군은 헨더슨 비행장에서의 미국 항공력 때문에 느린 화물선을 사용할 수 없었다.[6] 구축함은 화물선에 비해 연료 소비가 훨씬 많았고, 병력과 장비를 충분히 싣기 어려웠으며, 화물 적재 및 하역 장비도 효율적이지 않았다. 반면, 화물선은 속도가 느리고 기동성이 떨어져 쉽게 침몰되었다. 이는 물자 손실과 병사들의 전투 능력 저하로 이어졌다.[6]

결과적으로, 일본 해군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경제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구축함을 사용하면서 일본의 부족한 석유 공급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귀중한 함대 구축함을 소량의 병력과 물자 수송에 투입해야 했다.[6] 최상의 상황에서도 수송된 물자의 5분의 1만이 해안에 도달했으며, 이는 육상에서의 소모전과 해상에서의 값비싼 패배를 초래했다.

이후 일본군은 장갑정의 호위를 받는 바지선 호송에 의존하게 되었다. 1,000명의 병력을 300마일 수송하는 전형적인 구성은 2척의 소우코우테이급 장갑정이 2척의 특별 대형 상륙 바지선을 호위하고, 40척의 대형 상륙 바지선, 15척의 소형 상륙 바지선으로 구성되었다.[7]

과달카날 전투 동안 일본군은 제2사단과 제38사단 주력 (약 2,000명)을 수송하는 데 그쳤으며, 많은 수의 구축함을 잃었다. 구축함의 약점 때문에 피해가 커졌고, 막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쥐 수송을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잠수함 등 구축함 외 전투 함정의 수송 임무 사용도 확대되었다. 쥐 수송의 교훈을 바탕으로, 마츠형 구축함에서는 소발 탑재가 표준화되었고, 생존성 향상을 위한 기관 배치 변경이 이루어졌다. 또한, 수송 효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등 수송함과 2등 수송함이 계획 건조되었다.

6. 존 F. 케네디와 PT-109

존 F. 케네디가 지휘하던 ''PT-109''는 1943년 8월 1일 밤부터 2일 새벽까지의 도쿄 익스프레스 작전에 대한 공격 중 손실되었다.[8] 60발의 어뢰를 탑재한 15척의 PT보트가 30발 이상을 발사했지만 단 한 발도 명중시키지 못했다. 반면, ''PT-109''는 보급 작전을 마치고 돌아오던 일본 구축함 ''아마기리''에 의해 격침되었는데, 이 구축함은 항해등을 켜지 않은 채 30kn 이상의 속도로 운항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7. 과달카날에서의 도쿄 익스프레스 종결

1943년 2월 초, 연합군은 과달카날에서 승리하여, 인력과 물자를 보급하는 데 사용되었던 더 슬롯(The Slot)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게 되었다. 이는 일본군이 과달카날과 헨더슨 비행장을 탈환하려는 노력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섬에서 일본군에 대한 최종 승리를 알리기 위해, 연합군 육상 부대 사령관 알렉산더 패치 장군은 1943년 2월 9일 상관인 윌리엄 F. 할시 제독에게 "도쿄 익스프레스는 더 이상 과달카날을 종착역으로 하지 않는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8. 쥐 수송과 전투



쥐 수송을 수행하는 일본 구축함 부대와 이를 저지하려는 연합군 수상 부대 사이에는 여러 차례 해전이 발생했다. 쥐 수송은 야간에 활동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야전이 되었다. 룬가 해전처럼 전술적으로 야전을 특기로 하는 일본 구축함 부대가 종종 활약했지만, 전략 목표인 수송 임무에는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다. 연합군 함정의 레이더 운용 능력이 향상되면서 쥐 수송 부대는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 룬가 해전: 미 해군 중순양함 4척을 격침시키거나 파손시켰지만, 수송 임무는 중단되었다.
  • 빌라 스탄모어 해전: 일본 구축함 2척이 레이더 사격으로 일방적으로 전멸했다.
  • 클라 만 해전: 일본 측 기함이 격침되었지만 수송 임무에는 성공했다.


그 외 솔로몬 해역에서의 해전 목록은 솔로몬 제도 전투를 참조하라.

9. 이후의 영향

쥐 수송의 교훈으로, 이후 건조된 마츠형 구축함에서는 상륙용 주정인 소발 탑재가 표준화되었고, 생존성 향상을 위해 기관 배치의 변경이 이루어졌다.[4] 1943년에는 수송 효율 문제 해결을 위해 쥐 수송 전용 함인 1등 수송함과 2등 수송함이 계획 건조되었다.[4] 1등 수송함은 함미에 경사면을 설치하여 대발동정을 발진시킬 수 있었고, 2등 수송함은 전차 양륙함처럼 직접 해안에 접안할 수 있었다.[4]

참조

[1] 문서 Evans 176
[2] 서적 Derailing the Tokyo Express
[3] 웹사이트 HyperWar: History of USMC Operations in WWII, Vol. I: Pearl Harbor to Guadalcanal, Part VI [Chapter 9] http://www.ibiblio.o[...]
[4] 문서 Frank, p. 559
[5] 문서 Parillo
[6] 웹사이트 Oil and Japanese Strategy in the Solomons: A Postulate http://www.combinedf[...]
[7] 웹사이트 Japanese Use of Military Barges, from Tactical and Technical Trends, No. 43 https://www.lonesent[...] 1944-01-27
[8] DVD National Geographic Search for the PT-109 DVD
[9] 웹사이트 The Guadalcanal Campaign (David Llewellyn James) https://www.angelfir[...]
[10] 서적 『壮烈!水雷戦隊 夜戦の王者』 秋田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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